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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눌러 쓸 야곱의 이력서”

(창 33:1-17)

<2024년 9월 1일 성령강림후 제15주 교역자보건주일 설교 / 녹색>

●이력서: 신발을 끌고 다닌 역사에 대한 기록

취업을 위해서 회사에 제출하는 가장 기본적인 서류 중 ‘이력서’가 있습니다. 이력서는 지원하는 사람이 어디서 태어났고 어디서 공부했으며, 어떤 경험을 바탕으로 살아왔는지, 그리고 왜 이 회사에 지원하려고 하는지 간단명료하게 작성해서 제출하는 서류입니다. 그런데 ‘이력’이라는 말이 한자로 어떤 의미인지 아시나요? ‘이력’(履歷)이라는 말은 ‘신발’을 뜻하는 ‘이’(履) 자와 ‘넘다, 지나다’를 뜻하는 ‘역’(歷) 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력서’는 “신발을 끌고 다닌 역사에 대한 기록”을 뜻합니다.<권희철, 『당신의 얼굴이 되어라』 문학동네>

이렇게 뜻을 풀어보니 딱딱하고 삭막해 보이기만 하는 이력서라는 말에 왠지 삶의 철학이 배어있는 것 같습니다. 용혜원 시인이 ‘신발’이라는 시에서 “너의 신발을 한번 살펴보라. 신발의 모양이 너의 삶의 모습이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어떤 이가 신발을 끌고 어딜 갔고 무얼 했는지를 꼼꼼히 적어보면 그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만약 야곱이 이력서를 작성한다면 어떤 이력서를 적을까?’를 생각하면서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은혜로 눌러 쓸 야곱의 이력서”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야곱이 신발을 끌고 다닌 파란만장한 시간만 나열해도 매우 흥미로운 이력으로 보일 텐데, 거기서 일어난 일들과 변화를 적는다면, 이력서를 빼곡하게 채우고도 모자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력서를 쓸 때 반드시 유의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주 본문을 통해 나눈 것처럼,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력서 성명 기재란에 ‘야곱’이라 써야 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새로 지어주신 이름 ‘이스라엘’이라 써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미국의 작가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문학동네)라는 작품을 보면, 주인공은 어린시절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제임스 개츠” 하지만 주인공은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을 버리고 17살에 스스로 “제이 개츠비”라는 이름을 만듭니다. 이렇게 이름을 바꾼 이유는 그의 부모가 실패한 농사꾼이었기 때문에 불운하고 가난한 유년 시절에서 벗어나서 소설 제목처럼 ‘위대한 개츠비’, 즉 멋지고 화려한 인생을 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주인공은 ‘제임스 개츠’가 아닌 ‘제이 개츠비’라는 이름으로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어떡해야 할까요? 이력서에 바뀐 이름 ‘이스라엘’을 기입해야 할까요? 아니면 예전 이름 ‘야곱’을 고수해야 할까요? 여러분과 이 얘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의 축복이 아닌 하나님의 축복: 이스라엘

지난주 본문에서 우리는 얍복강 나루터에 있던 야곱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사건은 야곱의 이력서에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로 다뤄질 법한데, 거기서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을 했던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야곱의 샅바는 생각보다 완고했고, 하나님은 밤새 야곱의 샅바를 잡고 사투를 벌이셨지만, 야곱의 딱딱한 자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야곱을 이기지 못하겠다’ 이렇게 토로하실 정도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더는 안 되겠다!’ 생각하셨는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는 ‘반칙 아닌 반칙’을 행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거룩한 반칙’이라 이름을 붙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반칙에도 야곱은 물러서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허벅지 관절을 쳤을 때 야곱은 ‘악~ 소리’와 함께 주저앉을 만도 한데, 그는 양손으로 하나님 샅바를 더 강하게 붙잡은 상태에서 소리치기를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시면, 나는 절대 이 손을 놓지 않겠다!”고 애절한 마음으로 절규합니다.

이처럼 축복을 갈망하는 야곱의 절규에는 야곱이 살아온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야곱하면 뭐니뭐니 해도 ‘복’의 살마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야곱은 ‘축복을 갈망하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 전체가 ‘축복, 축복, 축복’하다가 결국, 여기까지 이른 것입니다. 축복을 위해 속였고, 속였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이후로 20년이 흘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형에게 죽을까봐 그랬는데, 곰곰이 그 이유를 따져보면 그 이유도 ‘축복’ 때문이었습니다.

그랬던 야곱이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다시 축복을 구한 것인데, 이 축복은 그가 고향에서 구했던 축복과는 판이합니다. 전에는 사람에게 구한 축복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축복을 구합니다. 전에는 땅의 것을 구하는 욕망 가득한 축복이었지만, 이제는 영원한 하나님 언약 백성이 되는 축복을 구한 것입니다. 이제 야곱은 제대로 된 복을 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요청에 하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그를 축복하십니다. 함께 읽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부르라!”(28) 이스라엘은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28)는 뜻이었습니다. 얍복강에서 받은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은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장자권 축복’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야곱은 그동안 지긋지긋하게 자기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장자권을 갈망하던 야곱’이란 이름을 벗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으로 살 수 있는 참된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첫째, 야곱과 에서가 화해하다

오늘 본문 창세기 33장은 이제 막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야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주목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야곱과 에서가 화해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한 야곱은 드디어 동이 터오는 해를 맞으며 얍복강을 건넜습니다. 그러자 오늘 본문 1절은 말하기를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1)고 말합니다. 이때까지 에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던 야곱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저 무시무시한 400명의 군사를 보라! 이제 나 야곱은 형의 손에 장렬히 죽으리라!’ 하면서 마음을 다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림을 보시면 어느 화가는 에서와 야곱이 만나는 장면에서 에서의 모습을 붉은 망토를 두른 장군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에서의 부하들도 완전무장한 군인들로 그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야곱과 그의 식솔들은 아무런 무기도 없는 양민들입니다. 야곱이 두려워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로 보여주는 야곱의 행동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형에게 죽을 것이 두려워 언제나 ‘맨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성경은 야곱이 ‘뒤에 있음’을 두 번씩이나 강조했습니다(32:18, 20). 그랬던 야곱이 이제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데, 본문 3절은 말하기를 “야곱이 사람들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에서를 맞이하면서 “몸을 일곱 번이나 땅에 굽히면서 형에게 가까이 나아갔다”고 합니다. 새 이름을 받더니 야곱은 정말 달라진 것입니다. 식솔들 뒤에 숨어 목숨이나 보존하려 했던 비겁한 족장이 아니라, 이제는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맨 앞으로 나가 형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생 야곱을 20년 만에 만난 형 에서의 모습은 더욱 감동적입니다. 본문 4절은 말하기를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4)고 말합니다. 용서를 위한 이 한 구절에 ‘달려가다-맞이하다-안다-목을 끌어 안다-입맞추다’라는 다섯 개의 동사가 연달아 사용됩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려는 야곱의 모습도, 20년의 앙금을 지우고 야곱을 용서하는 에서의 모습이 너무나도 감동적입니다.

●둘째, 야곱과 에서의 화해를 하나님이 준비하셨다.

둘째로 하나님이 야곱과 에서의 화해를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야곱과 에서의 행위를 똑같은 동사로 묘사하는데, 둘 다 “눈을 들어 보았다”(looked up)고 합니다.(1, 5) 창세기에서 ‘눈을 들어보는 행위’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행위’이고 ‘하나님이 준비한 것을 보는 행위’를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하나님의 사자가 자기 집에 온 것을 알아보았고,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하나님이 아들 이삭 대신 제물로 준비한 ‘수양’을 보았습니다. 창세기 24장을 보면, 이삭과 리브가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성경은 그들이 ‘눈을 들어’ 서로를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눈을 들어’ 형 에서와 사백 명의 장정들이 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야곱을 ‘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야곱과 ‘화해’하기 위해 달려온 병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이었습니다. 또한, 에서도 ‘눈을 들어서’ 야곱의 부인들과 조카들을 보았습니다. 동생을 용서했으니 가족을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에 야곱의 모든 가족은 차례로 에서에게 나가 절하면서 야곱과 에서의 화해는 점점 무르익어 갑니다.

●셋째로 야곱은 ‘복’이 아니라 ‘은혜’를 고백한다.

셋째로 야곱은 복(‘베라카’, hk'r'B.)이 아니라 은혜(‘하난’, !n:x')를 고백했다는 점입니다. 본문 5절에서 에서가 야곱에게 “너와 함께 한 사람들은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야곱은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야곱의 대답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 자식을 얻는 일은 ‘은혜’가 아니라 ‘복’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이삭에게도 각각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시라.”(창 22:17, 26:4)고 하셨습니다. 야곱도 그의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하사 너로 여러 민족을 이루게 하시리라.”(28:3)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원래대로라면, 형 에서가 “너와 함께 한 사람들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야곱은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복으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라고 말했어야 합니다만, 야곱은 ‘복’이 아닌 ‘은혜’라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복과 은혜’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둘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복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았을 때 받게 되는 것이라면,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을 때도 변함없이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복이 인과응보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라면, 은혜는 하나님의 측은지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이 조건적 복이라면, 은혜는 무조건적 복입니다. 이런 점에서 유대교가 복의 종교라면,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고, 구약성경 잠언이 복에 관한 책이라면, 욥기는 은혜에 관한 책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마19)이 복의 사람을 상징한다면, 유대교를 상징한다면,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는 은혜를 입은 사람, 기독교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이 행복지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은혜는 은총지수로만 표기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자식에 대해 복이 아닌 은혜로 고백한 것은 점차 그가 ‘은혜’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넷째, 야곱은 속임수로 빼앗은 ‘장자권’을 돌려줍니다.

넷째로 야곱은 자신이 속임수로 빼앗은 장자의 축복을 에서에게 성공적으로 돌려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32장과 33장에는 유독 ‘예물’(‘민하’, hx'n>mi)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32장 13절 이하를 보면, 야곱은 에서의 화를 누그러트리기 위한 예물로 550마리가 넘는 가축 떼를 준비했습니다. 여기서 ‘예물’이란 말은 성경 원어로 ‘민하’(gift, offering, present, sacrifice, hx'n>m)라고 하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선물’이란 뜻입니다. 본문 10절에서 야곱은 “내 손에서 이 예물(‘민하’)을 받으소서!”라고 에서에게 간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10절에서 야곱은 다시 한번 형에게 이렇게 간청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복, ‘베라카’, hk'r'B.)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11) 지금까지 야곱은 에서에게 ‘선물’을 주려했습니다. 하지만 11절에서 야곱은 선물이 아니라 ‘복’이라고 말합니다. ‘내게 있는 복을 제발 가져가 달라’며 강권한 것입니다. 야곱이 말하는 복은 어떤 복입니까? 20년 전 야곱이 에서에게서 빼앗은 장자권의 축복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야곱은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에서 형, 제발 내게서 이 지긋지긋한 장자의 복을 가져가시오! 형에게 빼앗은 그놈의 장자권 때문에 지난 20년간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었소!’라고 말입니다. 이에 성경이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에서는 야곱이 내려놓고 싶었던 장자의 복을 끝내 되돌려 받게 된 것입니다.

●33장의 패착

이처럼 야곱은 훌륭하게 자신의 이력서를 채웠습니다. 형 에서를 만날 일은 너무나도 두렵고 공포스러운 일이었으나, 그는 하나님을 만났고, 씨름한 뒤에 모든 것이 은혜로 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가 걸립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라”(창 32:28) 말씀하셨지만, 오늘 본문 어디를 찾아봐도 야곱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여전히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야곱은 하나님이 주신 새 이름에 얼떨떨하여 낯설었던 건 아닐까 싶습니다. 허벅지 관절 통증 때문에 온몸이 뻐근하고 얼얼한 상태에서 주신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여하튼 야곱은 새 이름을 받고도 여전히 옛 이름인 야곱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그런지 본문에서 우리는 여전히 뭔가 부족한 야곱을 보게 됩니다.

첫째로 9절에서 에서는 야곱에게 “내 동생아!”라고 감격스럽게 부르지만, 야곱은 에서를 ‘형’이라 부르지 못합니다. 9절을 함께 읽습니다.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아흐’, xa')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그렇습니다. 에서는 놀랍게도 20년 만에 만난 야곱에게 ‘동생아!’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 ‘형제여!’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동안 에서가 야곱을 동생으로 여겼을 리 만무합니다. 에서는 ‘야곱 이 자식, 언제고 내 손에 잡히기만 해봐라!’ 하면서 야곱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놀랍게도 에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 동생아!”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그의 마음을 돌려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반면에 야곱은 어떻습니까? 에서가 “내 동생아!”라고 말하자 10절에서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우리말 성경은 야곱이 에서에게 꼬박꼬박 ‘형님’이라고 부른 것처럼 번역해 놓았지만, 성경 원어에는 형님이란 말이 없습니다. 야곱은 에서와 화해를 이룬 뒤에도 여전히 두려움이 남았던 것인지 그를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주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4, 15)

둘째로 이 일의 결국, 에서는 세일 땅으로 돌아갔지만, 야곱은 “숙곳”(Sukkoth)이란 곳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본문 17절은 말하기를 야곱이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다”(17)고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장소를 옮길 때마다 그곳에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렸지만, 그러나 본문에서 야곱은 ‘자기를 위한’ 집을 짓고, ‘가축을 위한’ 우릿간이나 지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야곱의 행태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행위가 없습니다. 게다가 오늘 읽지는 않았고 다음 주에 나누겠지만, 야곱은 ‘숙곳’에서 ‘세겜’으로 옮긴 뒤에 거기서 그의 딸 디나가 강간당하는 끔찍한 일이 만나기도 합니다.(창 33:18-34:2) 이것이 하나님 언약 백상 야곱에 의해서, 그것도 은혜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옛 이름을 버리지 못해 미적대는 야곱은 아직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갈 ‘새 이름 이스라엘’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화해의 장면에서조차 여전히 위축된 못난 꼬맹이었고, ‘하나님을 위한 제단’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집’을 먼저 짓고, 그 다음은 가축을 위해 우릿간을 짓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깜빡했을 뿐입니다. 야곱은 여전히 ‘그렇고 그런 야곱’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은혜로 눌러 쓸 야곱의 이력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창세기 33장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지만, 여전히 옛 이름의 그림자에 눌려 있는 ‘야곱’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의 모습은 한편 훌륭하면서도 다른 한편 여전히 지리멸렬하기만 해서 새 이름 이스라엘에 합당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속히 야곱을 벗고 ‘이스라엘’을 입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속히 ‘숙곳’을 떠나고, ‘세겜’을 떠나 ‘벧엘’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 이르러서야 다시금 하나님의 복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35장에서 말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모습을 통해 오늘 우리는 “은혜로 눌러 쓸 야곱의 이력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는데, 야곱의 이력서에는 이런 것들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나 야곱은 장자의 복을 빼앗고자 ‘속이는 자 야곱’으로 살았노라.

나 야곱은 신발을 끌어 도망자의 신세로 20년간 밧단아람에서 살았노라.

나 야곱은 다시 신발을 끌어 귀향길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겨루었노라.

나 야곱은 사력을 다해 하나님께 축복을 구했노라.

나 야곱은 ‘야곱을 버리고 이스라엘로 살라’는 축복을 받았노라.”

그리하여 야곱의 목소리는 떨립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 야곱은 비록 아직 이스라엘로 살지 못하지만, 마침내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됐노라.”

비록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는 이제 이력서를 은혜로 꼭꼭 눌러 채워나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성명 기재란에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을 기입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더는 복의 사람이 아니라 은혜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삶을 곰곰이 돌아보면, 많은 점에서 야곱을 닮았습니다. 오늘날 신앙생활하는 우리들은 야곱에게서 자화상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마라. 이스라엘이라 부르라”고 축복하신 것처럼, 고린도후서 5장은 우리를 축복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야곱이 이스라엘은커녕 여전히 낡아빠진 야곱의 허울을 쓰고 앉았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축복을 뒤로하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축복을 뒤로하고, 우리는 여전히 낡고 구태의연한 옛것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이런 생각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은혜의 이력서를 멈추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잘못한 것은 잘못한 대로, 칭찬받을 만한 것은 칭찬받을 대로, 그렇게 적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의 사람이 아닌 은혜의 사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끝끝내, 비록 지금은 아닐지라도, 우리 이력서의 성명 기재란에도 우리의 옛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이라 온전히 기입하여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 삶엔 참된 기쁨이 되는 삶을 사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