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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때에 아브라함이 기억할 두 가지”

(창 20:1-7, 20:17-21:3)

<2024년 5월 26일 삼위일체, 웨슬리회심기념, 서강교회 122주년 기념주일 설교 / 흰색>

●복된 주일, 그리고 창립 122주년 기념 예배

오늘은 <삼위일체주일> <웨슬리 회심 286주년 기념 주일>(1738.5.24.) 그리고 우리 <서강교회 창립 122주년 기념 주일>(1902.05.25.)이라는,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세 가지 굵직한 기념일을 맞았습니다. 기독교 교리로 보자면 ‘삼위일체’는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의 신비로운 존재를 설명하는 핵심적 교리 중 하나이고, 웨슬리 목사님의 회심으로 보자면, 이는 감리교회의 탄생과 직결되는 위대한 사건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를 생각하면 오늘은 122년 전 서강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복된 주일을 맞아서 이러한 세 가지 굵직한 기념일을 함께 기억하며 예배하는 것은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122년 전 교회를 세우시고 한결같은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 교회를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제 ‘눈을 들어 새로운 100년을 바라보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받들어야 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듯이,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는 예전 같지 않습니다. 교회에 대한 모든 지표는 바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위해 여러분에게 데이터를 보여줄까도 생각했지만, 이젠 ‘도표’라든가, ‘통계’를 따져보는 것이 식상할 정도로 미래 교회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교회 부흥의 때’는 완전히 지나갔고, ‘쇠락의 때’가 왔다고들 말합니다. 교회의 미래에 대한 이와 같은 암울한 전망을 생각한다면, 오늘 교회 창립 122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서강교회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교회의 역사 122년이 거의 한국 교회의 역사이기도 하다면, 한국 교회는 이 시점에서 무엇을 숙고하고 점검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물음으로 저는 오늘 “위기의 때에 아브라함이 기억할 두 가지”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목을 이렇게 정한 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문제가 어쩌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위기와 많이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나눌 때, 하나님이 도우셔서 우리에게 말씀을 깨닫는 지혜를 주시고, 그 말씀에 부딪혀서 우리 삶의 변화, 그리고 한국 교회의 변화를 도모하는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그랄 지역으로 이주했는가?

오늘 본문 창세기 20장은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나무 지역을 떠나 네게브 땅으로 옮겨 그 중 ‘그랄’(Gerar, rr'G>)이란 곳으로 거처를 옮긴 일에 대해서 언급하며 시작합니다(1절). 지도를 잠깐 보시면, 그랄 지역은 당시 ‘블레셋 족속’이 살던 땅인데, 이름하여 “체류하는 곳”(Sojourning)이라는 뜻입니다.<abarim-publications.com> 나중에 보시겠지만 창세기 26장을 보면, 이로부터 약 80년쯤 뒤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이곳에 와서 잠시 체류하기도 했습니다.(창 26:20)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내용을 나누기에 앞서 우리는 이런 물음을 갖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지난 20년 동안 머물렀던 마므레 상수리 지역을 왜 떠났는가?’라고 말입니다. 비록 마므레 상수리 지역은 이방인의 땅이지만, 거기서 이웃과 더불어 동맹을 맺을 정도로 친화력을 갖고 살았고, 거기서 천사들도 만났고, 318명의 용사와 함께 위험에 처한 조카 롯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아서 하나님 언약을 가슴에 품고 예배하며 살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은 자신의 예배 처소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된 것일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갈 때 그랬던 것처럼, 마므레 상수리 지역에 갑자기 ‘기근’이 들어서 이주했을 것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만약 그게 이유라면 본문에 ‘기근이 들었다’는 한 구절만 넣어서 설명하면 그만인 것을, 그런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좀 더 복잡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아브라함만의 사정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물음을 갖게 됩니다. 이를 위해 잠시 아브라함이 걸어온 삶의 노정을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12장 이후로 우리가 만난 아브라함의 인생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중요한 삶의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 요약

첫째로 아브라함은 그가 75세에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12:1)는 언약의 말씀을 받고 하란 땅을 떠나 가나안으로 왔습니다. 하나님 말씀 하나만 믿고 떠난 위대한 모험이었습니다.

하지만 둘째로, 가나안 땅에 산 지 10년이 지나도록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86세 되었을 때 아내 사래의 제안으로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언약의 자손이 아니라 말씀하십니다. 이 일로 인해 집안 분위기만 엉망이 되어버렸고 하나님의 언약은 여전히 요원해 보입니다.

셋째로 시간이 흘러 아브라함이 99세요 사라가 89세가 되었을 때, 곧 그가 하란 땅을 떠난 지 24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삭’(Isacc)이라는 이름을 점지하시며 언약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네게 후손을 주겠다’는 소리를 어디 한두 번 듣습니까? 식상할 정도로 지겹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라”(창 17:19, 18:10)고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만, 이젠 별로 믿어지지 않는 얘기라 그랬는지 아브라함도 그렇고 아내 사래도 그렇고, 하나님의 준엄한 약속 앞에 둘 다 콧방귀를 뀌며 비웃습니다.(창 17:17, 18:12)

이 일 직후, 넷째로 아브라함은 타락한 소돔 땅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듣고는 그곳에 ‘의인 열 명이 있으면 어쩔 것이냐?’면서 도발합니다. 제 딴에는 하나님이 마구잡이로 소돔을 심판하시다가 그 땅에 살아 있을 의인까지 죽게 한다면, ‘과연 그것을 하나님의 정의라 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난주 살펴본 것처럼 소돔 땅은 열 명은 고사하고 단 한 명의 의인도 살지 않는 완벽히 타락한 땅이었습니다. 이에 소돔은 비처럼 내리는 유황과 불에 의해 완전히 멸망한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지난주에 나누지는 않았지만,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창세기 19장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게 있습니다. 이처럼 멸망하는 소돔 성의 모습을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전날 ‘의인 열 명’ 운운하며 하나님을 도발하던 ‘바로 그곳에 서서’, 그 끔찍한 멸망을 망연자실하여 쳐다본 것입니다.(19:27-28) 소돔은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롯의 행방을 알 길 없던 아브라함은 필시 자기 조카 롯도 그 화염과 연기에 휩싸여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시인 이육사의 ‘광야’ vs ‘노정기’

이러한 인생 노정을 겪은 아브라함은 깊은 좌절과 절망감, 그리고 무기력감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고자 했던 마음조차도 소돔 성처럼 새까맣게 타들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 부르심과 언약을 받은 때가 그의 나이 75세였을 때입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제는 99세, 아내는 89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주셨지만, 어디 아이 낳는 일이 이름 바꾼다고 될 일입니까? 그럴 거라면, 되도 벌써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한두 번이지, 젊은 사람들 연애할 때 ‘밀당’하는 것도 아니고, 잊을 만하면 나타나셔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12:2)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이제는 얄밉기까지 합니다. 귓가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마치 ‘이명’(耳鳴)처럼 떠나지 않고 맴돌지만, 민족을 이루기는커녕, ‘하란’에서 같이 나온 유일한 피붙이 조카 ‘롯’마저 잃었다고 생각하니 통탄할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느꼈을 허무와 상실감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소돔의 멸망을 지켜보던 그 아침, 그 자리에서, 그의 마음은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헤아리다가 저는 문득 일제 강점기 때의 저항 시인으로 유명한 이육사 선생님(1904-1944)이 떠올랐습니다. 이육사 선생님은 열일곱 번이나 투옥될 정도로 독립운동에 앞장선 분이셨고, 게다가 탁월한 문학 작품으로 인해 언제나 시인 윤동주와 비교되던 우리 민족의 커다란 별이셨습니다. 선생님의 본명은 원래 ‘이원록’이셨는데, 감옥에 투옥했다가 받은 번호가 ‘264’여서 그 후로 이름을 ‘이육사’로 바꾸신 걸로 유명합니다.

이육사 선생님은 “광야”라는 시로 유명합니다. 그중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시구에서 힘찬 절개와 결의가 느껴집니다.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지만, 머잖아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노래한 비장한 시입니다.

이육사 선생님의 또 다른 시가 있습니다. 일본군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하던 중, 괴롭고 침울한 마음을 “노정기”(路程記: 떠돌던 삶에 대한 기록)라는 시로 달래고 있습니다.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조각 …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인 양, 다 삭아 빠진 소라 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머—ㄴ 항구의 노정에 흘러간 생활을 들여다보며”<전국국어교사모임 지음, 『이육사를 읽다』 휴머니스트> 시인은 자기 목숨이 이미 ‘부서져 버린 뱃조각’처럼 위태롭다고 말합니다. 나라를 빼앗긴 자신의 모습은 마치 ‘새벽 밀물에 젖어버린 한 마리 거미’처럼 소라 껍질 위에 붙어 숨을 할딱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재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두 시를 비교해보면, 하나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 다른 하나는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로 시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아브라함의 삶을 표현해주는 듯합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며 힘차게 언약의 길을 떠났지만, 노정을 돌아보니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처럼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초라하기 그지없던 것입니다. 그동안 무얼 믿고, 무얼 이루고 살았나 생각해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24년이라는 시간은 흘러 99세가 되었지만, ‘언약’은커녕, 하나 남은 피붙이마저 소돔 성의 화염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비통합니다.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분통하고 원통한 마음에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나무 지역의 예배 처소를 버리고 무작정 길을 떠난 것입니다. ‘새벽 밀물에 밀리고 밀려온 거미처럼’ 아브라함은 ‘그랄 성’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무기력한 아브라함이 보인 모습

이렇게 당도한 그랄 성에서 아브라함이 보여준 모습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 그랄 지역의 “아비멜렉”(왕의 ‘이름’ 또는 왕을 부르는 ‘호칭’)에게 상납합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이미 전과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 살자고 이집트의 바로에게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 상납한 비겁하고 치졸한 남편이었습니다.(창 12). 그런데 지금 그 비겁하고 치졸한 모습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아내를 상납한 이런 사람을 과연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 불러야 하나 싶은 의구심마저 듭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자,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그에게 자초지종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에게 준엄하게 말씀하시기를, 그 여인에게 손을 대면 “네가 죽으리라!”(3절) 하십니다. 화들짝 놀란 아비멜렉은 하나님께 변명하는데, 말인즉슨 ‘아브라함이 먼저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했고, 사라 또한 아브라함을 오라버니라 했다는 것’입니다.(5절) 그러니 누군들 이렇게 하지 않겠냐는 뜻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그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에 하나님도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안다”(6절) 말씀하시면서, 여하튼 아브라함의 아내를 돌려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사라와 동침하는 것을 막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창세기는 하나님 언약 백성의 이야기입니다. ‘언약의 후손이 어디서부터 어디로 이어지는가?’ 이게 중요합니다. 창세기 17장과 18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비웃음을 들어가며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7:17, 18:10)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두 사람 다 비웃었지만,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언약 백성의 후손을 이어가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사라도 의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는커녕, 무기력하고 침울한 나머지 세상 다 산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만났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 중 최악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조금이라도 신뢰하며 가슴에 품고 있었다면, 그는 그랄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지도 않았을뿐더러, 옮겼다 하더라도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일을 반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힘들어도 여전히 ‘이육사의 광야’를 목놓아 부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누굽니까? 그는 318명의 용사를 거느리고 저 무시무시한 북방 그돌라오멜 왕 연합군을 무찌른 ‘광야의 초인’과 같은 인물 아니었습니까?(창 14장) 맘만 먹는다면 아비멜렉을 단칼에 제압할 실력도 갖춘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제 용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힘없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육신이 늙어서가 아닙니다. 그의 마음에 꿈틀대던 하나님 언약이 흐릿해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오래되면 늙은 교회입니까? 누가 그러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늙은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성도들의 가슴에 펄펄 살아 있으면 천년이 지나도 살아 꿈틀대는 교회입니다. 하지만 이제 막 생겨난 교회라 해도 하나님 언약이 아니라 다른 것에 관심이 팔린 교회라면 그런 교회야말로 이미 늙고 병든 교회입니다.

안타깝게도 늙어버린 아브라함은 천사가 나타나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0)고 말한 사실조차 마음에서 증발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자기 아내의 몸’으로 성취될 것을 믿고 있었다면, 다른 건 몰라도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일은 차마 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이제 그는 물에 젖은 거미처럼 무기력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선지자요 기도자인 아브라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돌려보내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이어서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리라.”(7절)

이 말씀은 아비멜렉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이로써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서 해야 할 일 두 가지, 첫째는 ‘선지자’며, 둘째는 ‘기도자’라는 것입니다. 무기력감으로 자포자기하던 아브라함에게 해법을 주신 것입니다.

첫째로 ‘선지자’(‘나-비’, aybin")라는 말은 우리가 아는 ‘예언자’라는 말과 같은 말인데, 이 단어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고 있습니다. ‘선지자’(예언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한자로 보면 ‘先知者’는 ‘먼저 아는 사람’이고, ‘豫言者’는 ‘미리 말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여하튼 뭔가 미리 내다보고 앞서 말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그러면 선지자는 ‘무엇’에 근거해서 미리 내다보고, ‘무엇’에 근거해서 앞서 말합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미래를 예언했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명기 34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죽었을 때 그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나-비’)가 일어나지 못하였다”(신 34:10)고 하는데, 모세가 언제 미래를 예언하곤 했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세한 말씀을 드리지는 못하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예언자들은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그 말씀 중 핵심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입니다.<“예언자들은 동족들을 향해 하나님의 언약 소송(covenant lawsuit)을 제기한 사람들이다” 도널드 E. 고웬 지음, 『구약 예언서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선지자라는 것은, 이제 ‘언약의 말씀’이 성취될 때가 머지않았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도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왔으니, 이후로도 말씀만, 오직 말씀만 붙들고 ‘광야의 초인처럼 가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기도’(‘파-랄’, ll;P')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중보기도’(intercessory prayer)를 뜻합니다.(민 21:7, 왕상 8:33, 스 10:1)<abarim-publications.com> ‘누가 누군가를 위해 중간에서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광야에서 불뱀에 의해 심판받을 때, 두려움에 떨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무엇을 요청합니까?(민 21:7-8) ‘중보기도’입니다. 에스라서 10장을 보면, 학사 에스라는 하나님의 성전에 엎드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울며 중보기도합니다.(스 10:1)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도자’라 하신 것은 ‘언약 백성은 오직 기도로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만이 아니라 언약 백성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로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를 맞이하는 신앙: 말씀과 기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은 아비멜렉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새로운 정체성을 일러주셨으니, 하나는 ‘예언자’요 다른 하나는 ‘중보기도자’였습니다. 무기력감에 빠져 거처를 옮긴 아브라함, 자포자기하듯 하나님 언약의 소중한 통로가 될 사라를 아비멜렉에게 넘겨준 아브라함, 하나님 말씀이 식상해졌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이 귀찮아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두 가지는 다른 특별한 게 아니었습니다. ‘말씀과 기도’입니다.

이 일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본문 17절에서 아브라함은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니(‘파-랄’)”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셔서 그의 집에 닫혔던 태를 열어주셨다고 합니다. 21장 1절과 2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가 임신했으며,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사라가 아들을 낳았으니 그 이름이 ‘이삭’이라고 합니다.

‘말씀과 기도’만이 무기력하여 위기에 빠진 아브라함을 위한 해법이었던 것입니다. ‘물에 젖은 한 마리 거미’였던 아브라함은 ‘말씀과 기도’로 다시 ‘광야를 달리는 초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가 오늘날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바탕이 된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오히려 믿음의 조상이 되는 놀라운 입지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기에 빠진 아브라함, 무기력한 아브라함이 기억할 것은 오직 ‘말씀과 기도’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고자 하는 오늘 한국 교회에 요구되는 것은 다른 어느 것도 아닙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 이 두 가지입니다. 식상할 정도로 많이 말하고, 듣고, 강조하기에, 또 그 소린가 싶다가도, 문득 돌아보면 ‘말씀과 기도’ 외에는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가 살아나야 예배가 살아납니다. 예배가 살아나야 성도가 살고, 가정이 살며, 교회가 살아납니다. 그것이 한국 교회의 현재이자 미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국의 저명한 선교학자인 마이클 고힌(Michael Goheen, 1955~)은 수백 년 된 영국 교회가 문을 닫고, 미국 교회도 점자 쇠락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교회를 향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은 성경에 의해 형성되고 있습니까? 교회의 생사가 여기에 달려있습니다.”<마이클 고힌 지음, 『교회의 소명』 Ivp>

그는 영국과 미국 교회의 쇠락 원인을 교회 성도들이 그들 삶의 기반을 성경이 아니라 다른 것에 두었기 때문이라 평가한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는 고리타분하거나, 그저 그런 좋은 얘기로 취급하지만, 시대의 문화와 철학에 너무나도 쉽게 휩쓸려 버리는 교회의 현실이 교회 쇠락을 낳았다고 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허락하신 122년에 감사하고, 허락하실 100년을 기대하면서, 오늘 예배하는 우리 신앙의 정체성이 ‘말씀과 기도’로 새롭게 뿌리내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의 위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이 식상해지는 게 위기입니다. 수십년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내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고 내 삶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 교회의 위기입니다. 그런 교회가 늙고 병든 교회입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지역을 떠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이 그에게 ‘선지자요 기도자’라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 비로소 ‘말씀과 기도’로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어간 아브라함 이야기가 여러분의 이야기가 되어서, 의기소침하고 자포자기하고 싶을 때, 오히려 말씀을 깊이 깨닫고, 자신을 위한 기도와 가족과 성도를 위한 중보기도가 끊어지지 않는 신앙으로, ‘위기의 때’가 아니라 비로소 ‘하나님이 친히 이루실 선교의 때’를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