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신앙으로 여는 종교개혁주일”
(창 41장 1-16절)
<2024년 10월 27일 성령강림 후 제23주 종교개혁주일 설교 / 녹색>
●507주년 종교개혁주일, ‘교회는 상항 개혁되어야 한다’
오늘은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타락한 가톨릭교회에 저항하며 종교개혁을 감행한 지 507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전 세계 모든 교회가 10월 마지막 주인 오늘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키는 것은, 단지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독일의 어느 수사가 행한 옛날이야기를 떠올리려는 게 아니라, 오늘날 교회를 향한 경종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방금 저는 “오늘날 교회를 향한 경종”이라 했습니다. 종교개혁 정신은 근본적으로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경종을 의미합니다. 이날은 세상을 개혁하자고 시끄럽게 외치는 날이 아니라, 교회를 부둥켜안고 자성의 눈물을 흘리는 참회의 날인 것입니다.
특별히 쇠락해가는 오늘날 교회들, 유럽이나 미국 교회는 물론이고, 한국 교회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정신으로부터 이어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면, 작년에도 말씀드렸고 재작년에도 말씀드렸던, 그리고 오늘도 물론이지만, 앞으로도 줄곧 이날이 될 때마다 되새겨야 할 단 하나의 숭고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the church reformed, always reforming)라는 명제입니다. 달리 말하면 “교회는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종교개혁주일>은 교회가 감히 채찍을 드는 날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숱한 조롱의 말과 침-뱉음과 멸시와 천대를 받고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우리가 채찍에 맞고 겸손히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날이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아닌 남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허물을 들춰냈더라도, 이날만큼은 손가락이 남이 아니라 나를 향하고, 세상이 아니라 나와 내 교회를 향해 사랑의 매를 드는 것이 <종교개혁주일>의 본래 취지인 것입니다.
●본문 요약-1
오늘 본문 창세기 41장은 애굽 바로의 꿈을 요셉이 해석하고, 그에 따른 현실적인 대비책을 마련해 줌으로, 드디어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감격스러운 내용입니다. 전체 분량이 창세기에서 아주 긴 편에 속하는데,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과 함께 “요셉 신앙으로 여는 종교개혁주일”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이 속해 있는 창세기 41장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 지낸 지 ‘만 이 년’이 지난 어느 날, 애굽의 바로가 꿈을 꿉니다. 꿈의 내용을 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나일 강가에서 느긋하게 풀을 뜯어 먹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흉하고 삐쩍 마른 일곱 마리 소”가 아름답고 살진 소를 잡아먹는 것입니다(1-4). 그 꿈이 마치 현실에서 벌어진 것처럼 너무나도 생생해서 바로는 화들짝 놀라 꿈에서 깹니다.
바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휴, 다행이다. 꿈이었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잠이 들었는데 또 다른 꿈을 꾸게 됩니다. 이번 꿈에는 ‘씨알이 굵은 일곱 개의 이삭’이 줄기로부터 무럭무럭 자라났는데, 그 후에 ‘가늘고 삐쩍 마른 일곱 이삭’이 자라서는, 앞서 자란 ‘씨알 굵은 일곱 이삭’을 우걱우걱 집어삼키는 꿈이었습니다(5-7). 그 의문스러운 모습을 지켜보던 바로는 다시금 식은땀을 흘리며 놀라서 깹니다만, 다행히 이번에도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는 꿈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성경을 보니 “마음이 번민했다”고 합니다(8). 여기서 ‘번민했다’(‘파암’, ~[;P')는 말은 성경에 몇 번 안 나오는 아주 희귀한 단어인데, 다니엘서 2장을 보면, 다니엘을 포로로 붙잡아 갔던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꿈 얘기가 나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가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번민하여(‘파암’, ~[;P')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단 2:1)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애굽 바로가 ‘번민한 것’과 느부갓네살이 번민한 것은 같은 뜻입니다. 둘 다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하도 해괴망측해서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긴 하는데, 당최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어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해석할 사람을 찾아봤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점성가와 현인들을 불러도 봤지만, 왕의 꿈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8).
이처럼 바로의 번민이 더욱 커져만 가고 있을 바로 그때,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은 일전에 자기가 감옥에 있을 때 요셉이라는 히브리 청년이 자신의 꿈을 해석해 준 일이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그러면서 왕에게 고하기를 “그가 해석한 대로 되어 내가 복직되고 그(왕의 떡 굽는 관원장)는 매달렸나이다”(13)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바로는 즉시 사람을 보내서 요셉을 데려오게 했고, 바로는 불려온 요셉에게 다급한 심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고 합니다. 이에, 요셉이 오늘 읽은 마지막 구절 16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
●본문 요약-2
이후에 요셉은 바로의 꿈을 듣고,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해석합니다. 바로의 꿈에 나온 ‘일곱 마리 살진 소’는 7년의 풍년을 의미하고, ‘파리하고 삐쩍 마른 일곱 마리 소’는 7년의 흉년을 의미하는데,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31)이라 말했던 것입니다. 이에 요셉은 한 번 더 쐐기를 박아 말하기를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라”(32)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므로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경고를 순순히 받아들이라는 의미도 당신이 꿈을 이중으로 꾸었던 것이라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엄중한 경고장을 날린 요셉은 사시나무 떨듯 두려워 떠는 바로에게 해법을 제시해 줍니다. 요셉의 해법인즉슨, 7년 풍년을 맞았을 때, 수확한 곡물 중 1/5을 거두어서 각 성읍의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가(34-35),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보관해 둔 것으로 백성을 파멸에서부터 구하라는 것입니다(36). 이처럼 옳게 말하는 요셉을 향해 바로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38)라고 하면서, 자신이 끼고 있던 “인장 반지”를 빼서 요셉 손에 끼워주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혀주었고, 또한 “금 사슬”을 목에 걸어 주면서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41, 40b) 하면서, 요셉을 향해 놀라운 왕의 명령을 내립니다.
‘인장 반지’를 얻은 것은, 요셉은 왕을 대신해서 온 애굽에 조서를 내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행정력’을 가졌음을 뜻합니다. 최고급 세마포 옷을 입게 된 것은, ‘높은 신분’도 덤으로 얻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왕이 직접 걸어 준 ‘금 사슬’을 목에 받았다는 것은 애굽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까지 얻었음을 뜻합니다.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얻은 명실상부한 애굽의 총리로 등극한 것입니다. 이로써 총리 요셉은 그가 말한 대로 풍년이 들었을 때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이 들었을 때 온 백성을 구합니다. 심지어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왔다”(57)고 말하듯이, 애굽 땅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나라 사람까지 애굽에 와서 양식을 얻어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첫째, 요셉의 신앙도 항상 완성된 신앙은 아니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요셉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요셉이 보여준 신앙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처음 채색옷을 입었던 못난이 요셉이 노예옷과 죄수복을 거처 드디어 총리의 옷을 입게 된 과정에서 요셉은 어떤 신앙인으로 변모하고 있을까요? 그중 세 가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요셉의 신앙도 항상 완성된 신앙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그에게 “당신이 잘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40:14)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이것은 ‘청탁’입니다. 일을 봐주고 그것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일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런 요셉의 모습은 신앙인의 모습과 거리가 멉니다.
요셉의 청탁을 받은 술 맡은 관원장은 어떻게 했던가요? 그는 요셉의 해석대로 직위가 복권되었지만, 요셉을 까맣게 잊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40:23)고 말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서 풀려나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요셉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에게 많이 서운했을 것입니다. 그의 꿈을 해석해 준 것을 후회하고 불평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의심의 눈으로 요셉이 청탁한 말을 곱씹어 보니, 그를 온전한 신앙인이라 하기에는 다소 모자란 점이 확연히 눈에 띕니다. 그가 한 말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당신이 잘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40:14)
마치 간절한 기도문처럼 느껴지는 짧은 문장인데, 먼저 요셉이 ‘나’라는 말을 네 번이나 사용한 것이 눈에 띕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여전히 ‘나’였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말에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은커녕, 뭔가 조급함이 보입니다.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한 불만과 푸념까지도 느껴집니다. 게다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셉이 “당신이 잘되시거든”이라 말한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모습이 아니라 사람에게 청탁해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요셉의 신앙도, 마치 우리의 신앙처럼, 항상 온전하고 완성된 신앙인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둘째, 요셉의 신앙은 때가 이르러 하나님이 빚처주신 신앙이었다.
이런 점에서 요셉의 신앙이 보여주는 두 번째 특징은, 요셉의 신앙은 ‘때가 이르러 하나님이 빚어주신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꾸었다”(1)는 의미심장한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청탁이 거절된 지 만 이 년이 지난 뒤에 오늘 이야기가 시작하고 있는 것인데, 드디어 때가 온 것입니다. 이때는 ‘사람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입니다. 이때는 요셉을 위해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행하실 때’입니다. 이때는 ‘요셉이 기다리던 때’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에 맞추시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때가 이르러 자신의 일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만 이 년’이라하는 하나님의 시간에 이르러 바로는 꿈을 꾸었고, 그 뒤로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데, 그 일에 대해 본문 14절이 말하기를,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라”(14)고 묘사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요셉을 위해 친히 빚어주신 일이 마치 계곡물 흐르듯 ‘급히’ 진행됩니다. 요셉은 느닷없이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었다’ 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삶의 총체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게다가 밑도 끝도 없이 “바로에게 들어가니라”라고 말하듯이, 절차를 따지거나 보안 점검 따위를 하지도 않고, 죄수 요셉은 ‘감옥으로부터 바로 앞으로’ 마치 급행열차를 탄 것처럼 순식간에 직행했던 것입니다.
누가 이 일을 행한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의 신앙은 그가 이룬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요셉을 위하여, 요셉이 준비되었을 때를 기다리셨다가, 요셉에게 가장 좋은 때에 그를 위해 친히 빚어주신 선물과도 같은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셋째, 요셉의 신앙은 하나님만을 드러내는 신앙이었다.
마지막 셋째로, 요셉의 신앙은 하나님만을 드러내는 신앙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바로는 요셉을 만나자마자 반갑고도 다급한 마음으로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15)고 묻습니다. 이에 요셉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라고 대답합니다. 요셉의 대답은 간명합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가 요셉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어서 이러한 요셉의 대답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실감 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사실 이러한 요셉의 대답은 고대 사회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고대 이집트의 문헌 중에 <아히카르 이야기>(The Story of Ahiqar)라는 게 있습니다. 제목처럼 여기에는 “아히카르”라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을 만나고 배신을 당해서 몰락하지만, 끝내 다시 왕의 신임을 얻어서 복권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에서 왕의 신임을 얻어 아히카르가 복권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지혜’ 덕분이었습니다.
누구 얘기와 비슷합니까? 요셉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차이가 분명 있습니다. <아히카르 이야기>에 보면, 어느 날 이집트의 왕은 강대국 바빌론의 왕이 “돌을 꼬아서 밧줄을 만들라”(rope of stone)라는 불가능한 숙제를 받고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바빌론 왕이 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이를 구실로 이집트를 침략해 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인공 ‘아히카르’가 왕에게 말합니다. “왕이시여, 소인은 왕께서 말씀하신 그 문제를 해결할 만큼 충분히 지혜로운 사람이옵니다(I am wise enough!). 바빌론 왕이 돌을 꼬아서 밧줄을 만들라 하던가요? 소인이 할 수 있나이다. 소인이 해결하여 온 땅 위에 당신의 이름을 보존해드리겠나이다”<"The Story of Ahikar from the Aramaic, Syriac, Greek, Armenian, Arabic, Old Turkish, and Slavonic Versions", by F.C. Conybeare, J. Rendel Harris, and Agnes Smith Lewis.>
이야기를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이렇듯 고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지혜를 뽐내길 좋아합니다. 사실 그게 흠도 아니고, 오히려 고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본문이 말하는 요셉은 자기를 드러내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 ‘하나님만이 드러나는 삶’ 그것이 요셉 신앙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 ‘종의 옷’을 입고 배운 것이 그것입니다. 종이었다가 ‘죄수 옷’을 입고 배운 것도 그것입니다. 철저히 자신은 낮추고 오직 하나님만 높입니다. 그리하여 내린 요셉의 결론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요셉 신앙과 종교개혁주일 :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요셉의 신앙이 보여준 세 가지 의미를 나누었습니다. 정리해보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요셉의 신앙도 항상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자기 자신의 안위’를 구하기 위해 ‘청탁’이라는 세상적인 방법을 여지없이 행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그의 신앙이 불안했던 것은 채색옷을 입고 있었던 때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받은 유혹은 비단 보디발의 아내만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지내던 매 순간이 요셉에겐 위기의 순간이었고, 불안한 시간이었고, 유혹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 달콤한 유혹이란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나’를 내세우려는 유혹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셉을 기다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위해 위대한 일을 행하실 당신의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요셉이 보여준 놀라운 신앙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요셉에게 선물처럼 주신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셋째로, 요셉의 신앙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그릇 안에 오롯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잠재우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는 일’, 요셉 신앙의 가장 위대한 면모는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는 고백을 이루어 나가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요셉의 신앙에서 배워야 할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셉의 신앙은 오늘 <종교개혁주일>을 맞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디트리히 본회퍼의 ‘종교개혁주일 설교’ 중에서
지난 1월에 저는 감리교회의 목사님들과 함께 <설교공방>이라는 모임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현재 수도권 중심으로 45명 정도의 목사님들이 회원으로 있는데, 올해는 모임을 만든 첫해라서 중간에 정동제일교회에서 한번 모인 것을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계속 우리 교회에서 모이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모임에서는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 <1932년 종교개혁주일에 행한 설교>를 함께 읽었는데, 본회퍼 목사님은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는 “그러나 나는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라.”(계 2:4-5)고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종교를 개혁하겠다는 교회가 자신과 개혁을 분리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말할 때마다 하나님이 교회 자체에 맞서신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의한다’고 외치지만, 주님은 ‘나는 너에게 책망할 것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종교개혁주일은 우리에게 맞서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출정의 날입니다.”<디트리히 본회퍼, 『디트리히 본회퍼 설교집』 복있는사람>
또한 이렇게도 설교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교회는 끊임없이 많은 일을, 그것도 대단히 헌신적이고 진지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나없이 둘째 일, 셋째 일, 넷째 일은 많이 하면서도 처음에 하던 일은 하지 않습니다.”<『디트리히 본회퍼 설교집』>
조금 길지만 하나만 더 인용하겠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이렇게도 설교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여, 우리와 우리의 교회를 그분의 판단에 온전히 맡기는지요? 만약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조금씩 돌파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 돌파를 직접 해내려는 가장 무시무시한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일이므로, 다만 우리는 그분을 섬기고, 처음 사랑으로 그분을 하나님 되게 할 것입니다. 이제 교회 밖으로 나가거든, 멋진 종교개혁 기념 주일 예배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 밖으로 나가서, 처음에 하던 일들을 침착하게 행합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디트리히 본회퍼 설교집』>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교개혁주일>은 요셉의 신앙이 보여준 것처럼,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를 살고자 회개하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나를 버리고 하나님만이 드러나시도록’ 이를 위해 겸손한 마음으로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날이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날이 <종교개혁주일>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나는 너에게 책망할 것이 있다! 처음 사랑이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이 참으로 개혁되어서 주님이 주시는 정결한 영으로 회복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