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와 수치> 사용 설명서”

(마 15:21-28)

<2023년 8월 20일 성령강림 후 제12주 설교 / 녹색>

●예수를 찾아간 첫 번째, 두 번째 무리

오늘 저는 “<염치와 수치> 사용 설명서”라는 다소 생경한 제목으로 여러분과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설교 중에 저는 두 부류의 사람이 염치와 수치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살펴보고자 하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으로부터 배워서, 주님 앞에 항복과 복종으로 나오는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는 이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두 주에 걸쳐서 우리는 마태복음 14장에서 <오병이어 사건>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이 두 사건은 여러 이유로 우리에게 감동과 은혜를 주지만, 무엇보다도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고백’을 이끌어 주는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찾아온 몇몇 무리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무리는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한 무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배를 타고 빈들로 가실 때, 예수님을 만나려는 간절한 마음을 품고 저 멀리부터 따라간 사람들이었습니다.(마 14:13)

지난주에 나누었던 것처럼, 오병이어 사건 뒤에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파도와 싸우고,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만나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마태복음 14장 34절을 보면 예수님 일행은 “게네사렛”이란 동네에 정박합니다(14:34). 예수께서는 여기서 두 번째 무리를 만나시는데, 마태복음 14장은 “그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마 14:35-36)라고 말하듯이, 이곳 게네사렛 사람들도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만나러 갔었고, 게다가 “근방에 두루 통지했다”하는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 예수의 기쁜 소식을 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를 찾아간 세 번째 무리

그런데 예수께서 아직 거기 게네사렛에 계실 때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5장 1절은 그들을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를 만나러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는 ‘열심’으로만 보자면, 이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새벽기도 때에도 나눴지만, ‘예루살렘에서 게네사렛’까지 무려 150km나 되는 거리를 일주일이나 걸려 예수님을 찾아갈 정도의 ‘열심’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들의 열심은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전하는 열심히 아니라, 그 나라에 찬물을 끼얹는 열심이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저들이 예수님을 찾아간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안 씻고 먹었던 것”(15:2)을 따지러 간 것 아닙니까? 그 자세한 내용이 마태복음 15장 전반부에 나와 있는데, 예수께서는 저들의 무례하고 악의적인 물음에 차근차근 응대하신 뒤에 다음과 같은 강렬한 교훈으로 쐐기를 박으십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5:11)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읽다가 어느 책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김남일이라는 작가가 편집한 『염치와 수치』<김남일 편집, 낮은산>라는 책입니다. 책의 내용은 차치하고, 책 제목이 주는 무게감이 큽니다. 염치는 무엇이고 수치는 무엇입니까? “염치”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고, “수치”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부끄러움이 무언지도 모르고, 부끄러움을 느낄 줄도 모르는 굳어버린 심장이었습니다. 저들은 그야말로 “염치도 없고, 수치를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해서 죄책감을 안겨주고자 찾아왔지만, 예수께서는 한 톨의 염치도 없고, 일말의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저들, 그리하여 자기 삶에 대한 반성은 없고 ‘오만과 독선’이 가득한 나머지,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타인을 살리는 말이기는커녕, 늘 비난하고 정죄하는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부정한 사람이라고 폭탄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신 예수

이러한 씁쓸한 만남을 뒤로하고 오늘 본문 21절이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 말하듯,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나가서’ 국경을 넘으셨고, 이방인의 땅으로 ‘들어가’십니다. 여기서 “들어가셨다”(avnacwre,w)는 말은 “도피하다”는 뜻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예수께서는 과거에도 국경을 넘어 도피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친 요셉이 헤롯의 위협을 피해 아기 예수와 마리아와 함께 “애굽으로 떠났던(도피하다)”(마 2:14) 그 일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으로부터 위협을 느끼신 것인지, 아니면 그들에게 정나미가 뚝 떨어져서 그러신 것인지, 그들과 만난 직후에 생에 두 번째로 국경을 넘으셨습니다. 국내 선교만 하시다가 이제 해외 선교를 떠나신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께서는 귀신 들린 딸의 문제로 예수님을 찾아온 한 여인을 만나시는데,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고 그 결말은 무엇인지 여러분도 이미 잘 아실 것입니다.

특별히 그 과정에서 예수께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24),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다!”(26)라고 말씀하실 때면, ‘주님이 너무 매몰차다’ 싶은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할 때면, 소름 돋을 만큼 서늘한 감동이 밀려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 이방지역에서 행하신 첫 번째 선교였으니 어찌 그 선교가 쉬울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녀를 향한 말씀이 거칠고 야박하게 들려도, 그 말씀에는 그 여인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진심과 전심이 담겨 있는 것만큼은 분명할 것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이 여인을 만나고 있는 “두로와 시돈 지방”은 어디고 어떤 도시입니까? 이 도시들은 고대로부터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장악하던 ‘페니키아 사람들’(Phoenicia)의 도시 국가였습니다. 오늘날 ‘레바논’이 바로 이곳 페니키아의 후손들입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훗날 사도 바울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걸으신 그 길을 따라 바로 이곳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베니게”, 행 11:19, 15:3, 21:2)

두로와 시돈 지역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까지만 해도 이스라엘과 사이가 좋았습니다. 잘 알다시피 두로의 히람 왕(King Hiram)은 다윗과 솔로몬에게 백향목과 목수를 제공할 정도로 우호적이었습니다(삼하 5:11, 왕상 9:11). 하지만 그 뒤로 이 도시들은 예언자들에게 “소돔과 고모라 땅”에 버금갈 만큼 책망받는 도시로 줄곧 언급되고,(사 23장, 렘 47:4, 겔 26-29장, 욜 3:4-8, 암 1:9, 슥 9:2-4)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는 “예로부터 두로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적대적인 성향을 보여왔던 것(ill disposition towards us)은 세상이 다 아는 일”<Flavius Josephus, Against Apion, 1.70. Lexundria.com>이라 말했을 정도로, 두로와 시돈은 유대인들이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이방인 중의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곳에 가신 것은 유대인과 철천지원수인 ‘사마리아 지역’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매우 이례적이고, 심지어 금기시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이 땅에 들어가신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일부러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7:26a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

그곳에 도착하신 예수께서는 한 여인을 만납니다. 본문은 그녀에 대해 말하기를 “가나안 여자”(22a)라고 합니다. 마가복음 7장을 보면, 오늘 본문과 동일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태와 마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여인에 대해 말합니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마가복음은 이 여인에 대해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막 7:26a)이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 시대에는 헬라어(그리스어)가 공통어였습니다. 그것은 과거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 BC)은 그가 정복하는 곳마다 헬라식으로 교육했기 때문입니다.<“헬라문명은 교육(paidei,a) 문명”, 마르틴 헹엘 지음, 박정수 옮김, 『유대교와 헬레니즘1』 나남> 곧 헬라어로 장악한 헬라 문화가 300년이 지난 로마 시대까지 미쳐서 심지어 로마의 지식인들도 라틴어뿐만 아니라 헬라어를 선호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헬라인’(Hellenes)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민족’이라든가 ‘혈통’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문명인, 지성인”을 뜻한 것입니다.<“헬라식 문화와 지성을 공유하는 사람”, Isocrates, Panegyricus, section-50. perseus.tufts.edu제공> 더군다나 성경에서 여인을 특정해서 헬라인이라 부르는 것은 딱 두 번 나오는데, 하나가 이곳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 17장 12절에 나오는 ‘베뢰아에서 예수님을 믿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개역성경은 아예 그들을 “헬라의 귀부인들”이라고 번역합니다(행 17:12). 그러므로 마가복음이 이 여인을 “헬라인”(헬레니스, ~Ellhni,j)이라 소개하는 것은 그녀가 일반 서민이라든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배울만큼 배운 ‘식자층 귀부인’인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마가복음은 이 여인을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Syrian-Phoenicia)”(막 7:26a)이라고도 합니다. ‘수로보니게’라는 말은 말 그대로 ‘시리아-페니키아 족속’ 출신을 뜻하는데, 오늘날의 시리아는 낙후되어 있지만, 고대 사회의 시리아는 신석기 문화의 중심지로 지구상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였습니다. 게다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 해상무역을 주도했던 위풍당당한 페니키아 족속이라는 것은 그녀의 문화적 배경뿐만 아니라, 혈통적 배경이 얼마나 두터운 것인지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이 이 여인을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막 26a)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그녀는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왔던 당대 최고의 엘리트이자 부유한 여성인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영화에서 보는 고대 귀부인처럼 어쩌면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렁치렁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한 채로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가나안 여자”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과는 달리 이 여인을 “헬라인”이라 하지도 않고, “수로보니게 족속”이라는 소개도 빼버립니다. 마태복음은 다만 “가나안 여자”(15:22a)라고 소개합니다. 이렇게 소개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보통 ‘가나안’이라 하면 하나님이 출애굽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 3:8,17)으로서의 ‘가나안’을 의미합니다. 좋은 뜻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사람’이라 부르면 성경에서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신명기 7장 1절을 보면, 모세는 출애굽 백성들에게 이르기를 약속의 땅 가나안에는 “일곱 개의 족속”(“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기르가스 족속”)이 거주하고 있으니,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일곱 개의 이방 족속 중에 가나안 족속은 다른 족속에 비해 가장 크고 문명화된 족속이어서 이 지역을 대표하는 족속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족속들을 모두 일컬어 그냥 “가나안 족속, 가나안 사람”이라 부르기도 했던 것입니다(출 13:11, 수 7:9).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나안 사람이란, 이방인 중의 이방인이요, 원수 중의 원수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거주하려면,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야 했던 악연으로 얽힌 관계 아니었습니까? 이스라엘과 가나안은 공존할 수 없는, 오직 ‘너 죽고 나 살기’ 식으로만 존재하던 관계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원수의 땅에 들어가셨고, 본문은 그런 의미로 이 여인을 “가나안 사람, 가나안 여인”이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세 가지 면모

그런데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이방 여인, 곧 가나안 여인이 보여주는 모습이 실로 놀랍습니다. 첫째로 본문 22절을 보면 그녀는 뜻밖의 행동을 보입니다. 곧 “예수께 나와서 소리를 질렀다”(kra,zw)는 것입니다. 배울 만큼 배웠고, 가질 만큼 가진 헬라의 귀부인이 체면이 있지, 지금 길가에서 이게 다 무슨 짓입니까? 소리를 지르다니요?

둘째로 그녀가 소리 지른 내용을 보면 놀랍고도 불가사의하기까지 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22b)하면서, 가나안 사람과 적대관계에 있던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찾으며 소리를 지르는 것 아닙니까?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는 것”과 “다윗의 자손”을 부르는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성경에 나오는 누군가를 닮았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거라사의 광인”입니다. 그는 귀신에 들려 쇠사슬로도 통제가 안 되고,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 늘 괴기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던 사람이었습니다(막 5:1-5).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마가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막 5:6-7a)라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성경 원어를 보면, 가나안 여인이 ‘소리를 질렀다’는 표현과 거라사의 광인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는 표현은 똑같은 단어입니다(kra,zw).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은 지금 점잔 빼면서 예수께 간청하는 게 아니라, 거라사의 광인처럼, 제정신이 아닌 미친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예수께 간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오늘 본문에서 가나안 여인은 자신에게 차갑고도 야박하게 대하는 예수께 단 하나의 호칭만을 고수합니다. 곧 죽어도 그녀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릅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그리하고, 게다가 엎드려 “절하기까지” 합니다. “주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22) “여자가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25)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

“주여, 주여, 주여!” 세 번 부르는 동안 가나안 여인의 목소리는 점점 거칠어졌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향한 원망의 소리를 드높이는 게 아니라, 간절함을 더하고, 절박함을 더하여 거라사의 광인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절규하기를,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나를 도우소서!” “주여, 옳습니다!” 하며 세상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기도를 예수께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염치와 수치> 사용법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가나안 여인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앞에서 언급했던 표현을 그녀에게도 붙여보고자 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염치도 없고, 수치를 모르는 여인”이라고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염치”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인은 지금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이 순간 그녀가 아는 것은 오직 ‘주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치”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라 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지금 부끄러움을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이 순간 그녀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저는 염치도 없고, 수치도 몰랐던 어떤 사람들을 언급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저들과 가나인 여인, 둘 다 염치도 없고 수치를 모르는 것은 똑같지만, 분명 그 내용과 속사정은 다릅니다. 염치와 수치를 사용하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존심을 앞세웠고, ‘자기-의’라는 함정에 빠져 있었기에, 부끄러움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느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남은 것은 불순한 오만(Arrogance)과 편협한 독선(Self-righteousness)뿐이었습니다. 반면에 가나안 여인은 자존심을 버렸고, 자기를 포기하였기에, ‘주님 앞에 부끄러움이 다 무엇이냐!’는 심정으로 염치도 수치도 느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녀에게 남은 것은 거룩한 ‘항복’(surrender)과 순결한 ‘복종’(Obedience)뿐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지난 ‘오병이어 기적 사건’ 설교에서 그 빈 들에 있던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열두 바구니가 차게 거둔 것”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은 오천 명만 먹이시려고 떡을 주셨는데, 어쩌다 보니 열두 바구니를 채울 만큼 남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다 먹이고도 남아 열두 바구니를 채울 만큼 떡을 만드셨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열두 바구니의 떡이 누구에게 가야 하나?” “열두 바구니의 주인은 누구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고 보니 그 열두 바구니가 임자를 만났습니다. 곧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열두 바구니 모두를 차지해도 좋을 “항복과 복종”이라는 가장 복된 자질과 성품을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는 “믿음이 작은 자여!”(마 14:31)라고 말씀하셨지만, 오늘 본문의 이방 여인, 가나안 여인에게는 “네 믿음이 크도다!”(28)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기를 포기하는 과정’입니다. 신앙은 ‘의심’을 버림으로 시작해서, ‘자존심’을 버림으로 완성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데, 예수님을 만난다는데, 자존심이 다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가나안 여인처럼, 예수 앞에 나와 모든 걸 내려놓고, 염치와 수치를 던져버리고, 오직 항복과 복종으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나를 도우소서, 주님이 언제나 옳습니다”로 겸손히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고백하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