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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자, 말 안 하는 자, 말 못 하는 자의 소리”

(창 34:1-7, 24-31)

<2024년 9월 8일 성령강림 후 제 16주, 교회연합주일 설교 / 녹색>

●『가재가 노래하는 곳』 by 델리아 오언스

얼마 전에 『가재가 노래하는 곳』(델리아 오언스, 살림)이라는 소설을 아주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1950년대, 미국의 어느 가난한 가정을 배경으로 하는데, ‘카야’라는 이름의 6살짜리 소녀가 주인공입니다. 소설 전반부에 보면, 늘 술에 취해 가정 폭력을 행사하던 아빠 때문에, 엄마가 집을 나가고, 곧이어 큰 오빠와 언니 둘도 그리고 바로 위 오빠마저 집을 나가게 되어서, 결국, 그 집에는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카야’라는 6살짜리 어린 딸만 남습니다.

주인공이 사는 집은 여느 마을에 있지 않았고, 배를 타고 굽이굽이 들어가야 하는 습지대에 있었습니다. 지역에서 집값이 가장 싼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나마 있던 아빠마저 집을 떠나게 돼서, 주인공 카야는 일정 나이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혼자 살아야 했고, 사람들은 주인공을 천덕꾸러기 취급합니다.

카야는 학교에 다녀보려고 7살에 학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카야한테 “단어 개Dog의 철자를 한번 말해 볼래?”라고 물었지만, 알파벳을 배워본 적이 없던 카야는 예전에 오빠가 가르쳐 준 것을 어렴풋이 떠올리다가 이렇게 주저하며 대답합니다. “G-o-d” 아이들은 배를 잡고 웃으며 폭소합니다. 쉬는 시간이 되자 반 아이들이 남루한 차림의 카야에게 와서 “어디 숨어 살았니, 습지 암탉아? 모자는 어디에다 두고 왔니, 늪 시궁쥐야?”라며 조롱합니다. 그날로 카야는 학교에서 나왔고 다시는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습니다. 나중에 22살이 된 주인공 카야는 습지대에서 관찰한 것들을 글과 그림으로 그려서 엄청난 작가가 됩니다. 카야는 해가 뜨고 지는 습지의 하루를 정확히 관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녀만의 독특한 표현과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도 예술적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습지에서 혼자 살아야 했던 카야는 숱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카야를 도와주기는커녕, 손가락질했고, 아무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카야가 어느 가게에서 4살쯤으로 보이는 꼬마에게 “안녕”하고 인사했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엄마이자, 소설에서는 ‘감리교 목사 사모’라 소개되는 여인이 득달같이 와서는 “어이, 거기, 저리 가지 못해!”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있는데, 평소 사람들이 카야를 어찌 대하는지 가늠해볼 만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소설에서 주인공을 긍휼히 여기면서 도와주었던 유일한 존재가 있습니다. 습지 선착장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하던 ‘메이블과 점핑’이라는 흑인 부부였습니다. 1950년대가 배경이었기 때문에 소설에서 사람들은(백인들은) 그 부부를 향해 ‘깜둥이’(negro)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천대받고 멸시받던 흑인 부부였지만, 오직 그들만 카야에게 천사처럼 다가가 말을 걸고 그 아이의 삶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하며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그중 남편의 이름이 ‘점핑’(Jumping)이 된 것에 대해 소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배만 보면 펄떡펄떡 뛰어오른다고 사람들은 그를 ‘점핑’이라고 불렀다. 하얀 구렛나루와 소금과 후추를 뿌린 듯한 머리카락이, 넓적하고 너그러운 얼굴과 부엉이 같은 눈을 감싸고 있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설사 우리가 이 흑인의 이름처럼 ‘점핑’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 외로울 때, 누군가 소외당하고 있을 때, 누가 누구로부터 희생당하고 있을 때, 그들을 조롱하지 않고, 멸시하지 않고, 무엇보다 외면하지 않고 조용히 다가가서 말을 하고, 말을 들어줄 수만 있어도 세상은 얼마나 밝아질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에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는 주인공 카야를 조롱하고 손가락질 하던 ‘말하는 자’입니다. 둘째는 카야를 잘 돌볼 책임이 있엇지만, 딸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폭력이나 일삼다 집을 나간 ‘말 안 하는 자’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이런 배경으로 인해 침묵을 강요당하던 주인고 카야처럼, ‘말 못 하는 자’가 나옵니다.

●땅을 구입한 야곱

지난주 창세기 33장에서 우리는 에서와 야곱의 화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여러 아름다운 의미가 담긴 사건이기도 했지만, 야곱을 생각하면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야곱이 “숙곳”(Sukkoth) 땅에 갔고, 그곳에서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지만, 정작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야곱은 ‘숙곳’에 이어서 ‘세겜’(Shechem)이라는 땅으로 들어가는데(33:16-18), 이곳은 오래전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으로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곳”(창 12:8)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숙곳을 떠나 세겜으로 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잠시 머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야곱의 치명적인 실수를 말해주는데, 곧 야곱이 세겜에서 땅을 구입한 것입니다(33:19).

야곱이 땅을 구입한 것이 왜 치명적인 실수가 될까요? 요즘 같아서는 ‘재테크라도 하려나?’하고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고대 사회에서 어느 지역에 들어가 땅을 사는 것은 ‘그 땅에 눌러앉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여기를 떠나기 싫다’ ‘이제 더는 가기 싫다’는 마음의 완곡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세겜 땅에 머물면 안 됩니다. 그는 반드시 하나님이 명령하신 곳으로 가야 합니다. 지도를 잠깐 보시면, 야곱이 처음 가나안 땅을 떠날 때 그는 ‘브엘세바’에 있었습니다.(“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갔다”, 창 28:10) 그러다가 야곱이 하란, 곧 밧단아람에서 20년을 산 뒤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창 31:13)고 명령하셨습니다. 야곱의 출생지가 어딘지 성경은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가 떠난 곳이 ‘브엘세바’였으니 다시 돌아갈 곳도 브엘세바일 것이라 추정할 만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세겜에서 땅을 구입할 게 아니라 신속히 떠나야 합니다. 이후 “벧엘”(35:1)을 거쳐 아버지 이삭이 사는 “헤브론”(35:27)까지, 그리고 “브엘세바”(46:1)까지 가야 했습니다. 최종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야곱은 멈춰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디나의 강간 사건

그러므로 오늘 본문 창세기 34장은 야곱이 머물러서는 안 되는 곳에 머물고자 했을 때 일어난 비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창세기 34장은 야곱이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을 때 발생한 위험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더 나아가 창세기 34장은 하나님 없이 제멋대로 사는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2절을 보면 본문에 일어나 사건의 개요를 이렇게 말합니다.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가더니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했다”(창 34:1-2)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그 땅 세겜의 추장, 지명과 이름이 같은 “세겜”이라 하는 인물에게 강간을 당한 것입니다. 사건 개요가 말하듯이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는 뜻을 살펴보면, 디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땅의 딸들’이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듯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려 했을 때, 그의 종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라”(24:3)고 신신당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은 가나안의 딸이 아닌 밧단아람까지 와서 리브가를 데려갔던 것입니다. 또한, 창세기 27장을 보면, 리브가가 남편 이삭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창 27:46)

창세기가 말하는 ‘가나안의 딸’(이 땅의 딸)은 썩 좋지 않은 표현이 분명합니다.<케네스 매튜스, 『창세기2』 부흥과개혁사> 본문에서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고 하니, 이러한 디나의 행위를 두고 좋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세(Yosei)라는 어느 유대 랍비는 이러한 디나의 행위를 ‘매춘’과 연결 짓습니다. 에스겔서 16장이 “어머니가 그러하면 딸도 그러하다 하리라”(겔 16:44)고 말한 것을 애써 인용하면서 창세기 30장에서 야곱을 유혹했던 레아의 행동과 연결시킵니다. 레아가 야곱을 보러 ‘나갔던’ 것처럼, 디나도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디나는 매춘부처럼 치장하고 나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기를 ‘레아의 딸이 — 나갔다’고 하는 것이다”(She came out adorned like a harlot.’ That is why, “Dina, daughter of Leah…went out.”)<Bereshit Rabbah 80:1, sefaria.org>

이러한 해석은 과도한 해석이거니와, 설사 맞다 해도 이 사건을 디나의 책임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가 정확히 아는 것은 ‘세겜이 디나를 강간했다’는 사실뿐입니다. 명백한 범죄를 저지른 세겜은 놔두고 디나의 실수를 부각하는 유대 랍비의 해석은 한참 왜곡된 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디나가 부주의했고,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손 치더라도, 이 사건의 책임은 전적으로 세겜의 잘못입니다.

●첫째, ‘말하는 자’

그러면 이 사건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이후에 벌어진 일에서 우리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설교 제목처럼, 첫째는 ‘말하는 자’, 둘째는 ‘침묵하는 자’, 그리고 셋째는 ‘말 못 하는 자’를 만나게 됩니다.

첫째로 이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말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가해자 측을 보면, 정작 가해자 당사자인 ‘세겜’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하몰’이 주로 말하고, 피해자 측에서는 정작 피해 당사자인 ‘디나’가 아니라, 그렇다고 디나의 보호자인 ‘야곱’도 아니라 야곱의 아들들이 말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가해자 측과 피해자 측, 각각 대변인들이 말하고 있는 격입니다.

물론 디나를 범한 세겜이 먼저 말문을 열긴 합니다. 그는 디나를 능멸한 뒤에 갑자기 로맨티스트가 되어 꿀 같은 말로 디나를 현혹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몰에게 청하면서 말하기를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4절)라고 합니다. 아버지더러 피해자 측 가족과 협상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인데, 드라마를 보면, 종종 재벌 2세로 나오는 인물들이 잘못은 자기가 저질러 놓고, 아버지라든가 변호사를 고용해서 해결하려는 행태처럼 지질해 보입니다.

아들의 청을 수락한 아버지 하몰은 야곱을 찾아와서는 ‘이왕 일이 이렇게 됐으니, 집안 대 집안으로 거래를 해보자’고 제안합니다. ‘디나를 내 아들에게 줘서 결혼을 시키고, 다음에는 우리 딸을 너희가 데려가면 되지 않겠느냐?’(8-9)는 거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에 피해 당사자인 디나에 대한 걱정은 없습니다. 그저 오냐오냐 키웠던 아들 세겜을 위한 것이고, 결국에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두 집안 모두 ‘Win-Win 하자’는 제안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몰의 말에 흥분하며 분노하는 사람은 야곱이 아니라 야곱의 아들들이었습니다. 7절을 보면 동생이 강간당한 사건으로 인해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 13절을 보면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을 향한 발톱을 잠시 숨기고 “속이기로” 작정합니다. 어떤 내용으로 속이고 있습니까? ‘동생과 세겜을 결혼시키고 싶으면, 너희 중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으라!’(15)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할례를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지만, 속으로는 어떤 생각입니까? 저들이 할례를 받으면, 그 통증으로 거동조차 할 수 없을 때 죽이려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본문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24) 하몰과 세겜을 비롯하여 그 땅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로부터 3일이 지나 할례의 통증이 극에 달하자, 야곱의 아들들, 특히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몰래 기습해서 들어가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왔다”(25)고 합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야곱의 아들들은 시체가 즐비한 그 성읍에 들어가서 노략질을 합니다. 양과 소와 나귀를 비롯해서 모든 재물을 빼앗고, 그들의 자녀와 아내들까지 사로잡습니다(27-29). 실로 참혹한 ‘피의 보복’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첫째 부류, “말하는 자들”이 벌인 ‘피의 학살’이었는데, 앞서 말씀드린 유대 랍비는 이러한 참혹한 결과를 누구 탓으로 돌리고 있을까요? ‘디나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게 누구 때문인가? 레아의 딸, ‘디나’가 매춘 복장으로 나갔기 때문이다”(Bereshit Rabbah 80.1)라고 말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해석입니다.

●둘째, ‘말 안 하는 자’

이처럼 ‘말하는 자들’이 힘없는 여인 하나를 놓고 거래하고, 속이고, 피의 복수로 설쳐대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본문에서 “말 안 하는 자”를 발견합니다. 야곱입니다. 5절 말씀을 보면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다”(5)고 합니다. 야곱은 잠잠하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디나’는 야곱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피해 당사자인 그의 딸 디나를 위해 어떤 불이익과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야곱이 잠잠한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비겁한 일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끔찍한 일을 당한 디나를 위해 끝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하몰과 세겜이 찾아와서 자신의 아들들과 거래한 것은 비밀리에 한 일이 아니라 공식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자식들이 하몰과 세겜을 속여 보복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야곱이 모를 리 없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식들이 획책하는 잔인한 복수혈전을 알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수수방관한 것이고 방조한 일입니다.

그러다가 야곱은 30절에 가서야 입을 엽니다. 야곱이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34:30)

하나님 언약 백성의 조상이 실로 초라한 겁쟁이의 몰골로 앉아 있습니다. 말을 해야 할 때는 입을 꾹 닫고 있더니, 고작 입을 열고 한다는 소리가 ‘나’를 일곱 번이나 강조합니다. 그의 말에는 딸 ‘디나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없습니다. 자식들의 ‘잔인한 행동’에 대한 책망도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언약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증표인 할례를 자식들이 속임수에 이용해 먹은 것에 대해서도 못난 야곱은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오직 그의 관심은 ‘내게 화를 끼쳤다’ ‘나는 수가 작다’ ‘나를 칠 것이다’ ‘나를 죽일 것이다’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고 하는 자신의 안위뿐입니다. 하나님 언약 백성으로서의 품격이 어디로 달아나버린 것인지 그는 그저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고집쟁이로 전락한 것처럼 보입니다.

●셋째, ‘말 못 하는 자’

마지막으로, 이처럼 ‘말하는 자’들이 흉측한 몰골로 설쳐대고, ‘침묵하는 야곱’으로 인해 사태가 더욱 악화하고 있을 때, 우리는 세 번째로 “말 못 하는 자”를 만납니다. 그는 ‘디나’였습니다. 디나는 세겜에게 능욕당했던 때부터 그 집에 감금되었습니다. 양쪽 집안 사람들이 자기를 놓고 거래할 때도 세겜의 집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디나로부터 단 한마디 말도 들려주지 않습니다. 마치 숨이라도 멎은 듯, 디나에게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할 말이 많은 자는 디나입니다. 말도 말이지만, 그녀의 통곡 소리가 창세기 34장 전체에 울렸어야 합니다. 하지만 디나의 통곡은 ‘말하는 자들의 거래’에 묻혔고, ‘야곱의 침묵’으로 희석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두고, ‘사건의 원인은 디나가 매춘부의 옷을 입고 나갔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그 유대 랍비의 뻔뻔함에 디나는 오늘날에도 할 말을 찾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말 못 하는 자”가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디나의 통곡에 하나님은 할 말을 잃습니다. 디나를 짓밟은 사실을 거래로 둔갑시키려는 세겜과 하몰의 행동에 하나님은 할 말을 잃습니다. 거룩한 언약 백성의 증표로 주신 할례가 인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속임수로 전락해 버린 것으로 인해 하나님은 말을 잃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가 친히 언약 백성의 조상으로 택하신 야곱의 비겁한 침묵으로 인해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말을 잃습니다. 지금까지 창세기의 하나님은 언제나 “보시는 하나님, 들으시는 하나님”이셨는데, 오늘 본문 34장에 와서는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또는 디나와 함께 감금이라도 당해 계신 것처럼,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파기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귀환 명령을 어기고 자기 맘대로 세겜 땅을 구입해 눌러앉으려 했던 불복종의 사람 야곱과 그로 인해 일어난 비극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비극적인 사건 안에는 ‘말하는 자, 말 안 하는 자, 말 못 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말하는 자들’에게서는 ‘위선과 거짓의 소리’가 들렸고, ‘말 안 하는 자, 야곱’에게서는 ‘비겁함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말 못 하는 자’였던 디나에게서는 ‘소리 없는 통곡’이 새어 나와 하나님조차 말을 잃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비극의 근본적인 원인은 앞서 말씀드린 어느 삐뚤어진 유대 랍비의 왜곡처럼 ‘디나’가 아닙니다. ‘야곱’입니다. 세겜에 정착하려 했던 ‘야곱의 불복종’이 최초의 원인입니다. 그는 마치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른 제자들이 자기 눈 앞에 펼쳐진 영광에 현혹되었던 것처럼, 그리하여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 17:4)라 말하며 초막을 짓자고 했던 것처럼, 뭐가 그리 좋았는지는 몰라도 야곱은 세겜에 땅을 사고 그곳에 눌러앉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에서 살펴본 것처럼, 야곱의 불복종은 어느 개인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도시 전체의 비극이었고, 시대의 비극으로 번집니다.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치명적입니다. 더욱이 섬뜩한 것은, 하나님이 이러한 야곱의 불복종을 바라보시면서도 그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던 점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창세기 34장의 인간들을 버리고 떠나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롬 1:28)라고 말한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가장 무시무시한 심판은 “내버려-두심”이기 때문입니다. 혹여 세겜 땅의 그들을 내버려 두신 게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깨닫게 됩니다.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파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떠나신 것 같이 아찔하고도 침울한 창세기 34장을 만났어도, 그리하여 ‘말하는 자, 침묵하는 자, 말 못 하는 자의 소리’가 범벅으로 아우성이어도 하나님은 반드시 침묵으로 비겁하기만 했던 야곱을 들어서 이스라엘로 세우실 것을 믿습니다. 창세기 34장을 지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이 못난 언약 백성의 조상 야곱의 등을 두드리시며 다시금 그를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길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입을 닫아야 하는데 말하는 자’가 있고, ‘말해야 하는데 침묵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말을 빼앗긴 사람들의 통곡’이 지구촌 곳곳을 울립니다.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자기 맘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면서, 하나님을 인간 세상으로부터 저 멀리 밀어내거나, 하나님의 입을 틀어막고서 감금하려 듭니다.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비극이 본문에 나오는 디나에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백성을 찾으십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어나가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잘 받들어서 언약 백성으로서의 본문과 품격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